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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의 아름다움 - 외국어로 번역되지 않는 마음, '정'

by 유니닷:) 2025. 5. 2.

    [ 목차 ]

한글은 단순히 소리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문자가 아닙니다. 수많은 세월 동안 한국인의 삶과 정서를 담아낸 감정의 그릇입니다. 그중에서도 외국어로 쉽게 번역되지 않는 단어들은 한국인의 정서적 특성을 가장 잘 보여줍니다.

이번 블로그 시리즈에서는 그러한 단어들을 하나씩 탐구해보며, 한국어가 얼마나 풍부하고 미묘한 감정을 표현해낼 수 있는 언어인지를 조명해보려 합니다. 첫 번째 주제는 바로 ‘정’입니다. 사랑도 아니고 우정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감정.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지만, 외국인에게는 설명이 참 어려운 단어입니다.

 

한글의 아름다움 - 외국어로 번역되지 않는 마음, '정'

 

사전 속 ‘정’ vs. 삶 속의 ‘정’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정’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고 가는 따뜻한 마음. 또는 그것에서 우러나오는 인정.”

이 정의만으로는 ‘정’의 본질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다음과 같은 말들을 자주 합니다:

"그 식당, 별건 없는데 정이 가."

"같이 일한 지 오래돼서 정이 들었지."

"정 떨어지는 말 좀 하지 마."

이처럼 '정'은 친밀함, 애착, 연민, 익숙함, 연대감 등 여러 감정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감정의 덩어리입니다. 그리고 이 감정은 단순히 호감이나 애정으로 표현되지 않기에, 외국어로는 하나의 단어로 정확히 번역되지 않습니다.

 

정은 ‘시간’과 함께 쌓이는 감정

‘정’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작은 반복적 접촉과 일상의 공유를 통해 천천히 쌓이는 감정입니다.

예를 들어, 매일 아침 출근길에 마주치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에게 인사를 건네다 보면 어느새 ‘정이 들었다’고 말하게 됩니다. 오래된 물건, 자주 가는 골목길, 낡은 책상 같은 사물에도 우리는 ‘정이 간다’고 표현하죠. 이 감정은 단순한 기억의 축적이 아닌, 그것에 깃든 감정의 흔적을 말합니다.

외국에서는 이런 감정을 단어로 설명할 수 있지만, 그 감정에 내재된 시간성과 상호작용성은 오롯이 ‘정’이라는 단어에 담겨 있습니다.

 

사랑은 빠르게 타오르지만 쉽게 사라질 수 있습니다. 우정은 조건이 맞아야 형성됩니다. 하지만 ‘정’은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는 싫은 사람에게도 정이 들 수 있고, 반드시 좋아하지 않아도 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함께 일하면서 갈등도 많고 불만도 있었던 동료가 퇴사할 때, 우리는 “그래도 정이 들었는데 아쉽다”고 말합니다. 혹은 가족에게 서운함을 느끼면서도 "그래도 피는 못 속인다, 정이 있지"라고 합니다. 이처럼 ‘정’은 관계의 양면성을 모두 포용할 수 있는 감정입니다.

 

‘정’은 행동으로 표현된다

한국 사회에서 ‘정’은 대부분 말보다 행동으로 표현됩니다. 특히 연장자나 가까운 사람일수록 직접적인 언어보다 작은 배려와 돌봄의 제스처로 정을 나눕니다. 예를 들어:

밥을 먹을 때 “이거 더 먹어”라며 젓가락을 자연스럽게 상대 접시에 올려주는 행동

멀리서도 친구가 올 때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려주는 마음

추운 날 따뜻한 커피 하나를 슬며시 건네는 손길

이런 행위들은 외국인의 눈에는 ‘과도한 친절’로 보일 수도 있지만, 한국인에게는 자연스럽게 정을 주고받는 방식입니다.

 

‘정’은 긍정적인 감정으로만 작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만큼 강한 감정이기에 반대의 감정으로 변할 때도 강하게 표현됩니다. ‘정 떨어진다’는 표현은 사랑이나 관심이 급속도로 식었음을 뜻하는 강한 표현입니다.

이처럼 ‘정’은 관계를 맺는 근본이 되기도 하고, 관계가 멀어질 때 그 상실감을 더욱 크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는 정이 단순히 친절이나 배려를 넘어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적 뿌리임을 보여주는 예시입니다.

 

한국 문화 속 ‘정’의 다양한 모습

한국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정’은 매우 자주 등장하는 감정입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이웃들이 서로 반찬을 나누는 장면

영화 기생충에서의 가족 간 미묘한 연대감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 인터뷰 중 자연스럽게 나누는 정감

이러한 장면들은 모두 한국 사회가 ‘정’을 중심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문화임을 보여줍니다. 외국인들은 한국에 와서 가장 먼저 놀라는 것 중 하나로 "왜 이렇게 사람들이 친절하냐", "처음 만난 사람도 너무 잘 대해준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이는 단순한 친절이 아닌, 문화로 체화된 ‘정’의 표현입니다.

 

디지털 시대, 정은 사라졌을까?

현대 사회는 점점 비대면이 일상이 되고, 빠른 소비와 개인주의가 보편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정’이라는 감정은 시대착오적이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더욱 따뜻한 연결을 원하고, 그런 감정에 더 쉽게 감동을 받습니다.

SNS에서 누군가가 보낸 따뜻한 한마디

택배 상자 위에 남겨진 “수고하세요”라는 메모

댓글보다 더 큰 위로가 되는 직접적인 전화 한 통

이처럼 정은 여전히 우리 삶 속에 살아 있으며, 오히려 더 귀해지고 더 소중해지고 있습니다.

 

마치며: 정은 한국인의 감정 언어다

‘정’은 한국어 사용자만이 진정으로 느낄 수 있는 감정의 언어입니다. 언어는 곧 문화이고, 문화는 삶을 반영합니다. 우리가 ‘정’을 말하고 느끼고 표현하는 방식은 곧 한국인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이 단어 하나에는 시간, 사람, 공간, 기억, 돌봄, 애틋함, 그리고 익숙함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번역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번역할 필요 없이 그대로 느껴야 할 단어, 그게 바로 ‘정’입니다.

 

 

 

오늘은 다른 나라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한국의 고유언어 중 '정'이라는 단어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가장 어려워한다는 개념, ‘눈치’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눈치는 단순한 사회적 센스가 아니라, 상황과 감정, 관계를 읽어내는 고유한 문화적 감각입니다.
‘정’이 따뜻한 감정의 끈이라면, ‘눈치’는 그 끈을 매만지는 감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대한민국의 고유어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기대해주세요. 감사합니다.